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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먼로의 ‘거지소녀’ 서평

마루치아라치맘 2019. 12. 31. 12:46



◎ 작가에 대하여: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윙엄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장로교 집안, 어머니는성공회 집안

1959년 어머니 사만 장례식 참석하지 않음

1972 남편 제임스멀로와 이혼

1978년 소설집 who do you think are you

해외에서는 거지소녀 ‘the beggar maid’

20134. 17 사망

 

- 줄거리 요약

이 소설은 10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즈라는 동일 이름의 주인공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연작이다. 시간의 순서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 단편의 제목으로 구분되어 지지만,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 이름은 로즈’이.

소설 속에는 여인 3명이 있다. 로즈, 로즈의 새어머니 플로, 로즈의 딸 애나가 등장한다. 소설에는 그녀의 아버지, 그녀를 거지소녀라고 부르며 좋아한다고 고백한 남편 패트릭, 그리고 17살 된 딸 애나가 있다. 작가의 삶과 비슷하다. 작가가 45세 정도에 완성된 소설로 소설내용에서도 로즈는 같은 나이이다.

 

로즈의 새어머니 플로, 그녀는 로즈에게 자신이 겪었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자들에 대한 경계심이다. 로즈는 자라면서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플로는 그런 그녀가 겪을 수 있을 위험들을 경고한다. 플로의 아버지는 순종하고 고분거리는 딸을 기대하지만 로즈는 이름과 달리 거칠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런 딸을 갇우려 하지만, 아버지 또한 책을 읽으며 성장하는 딸에 대해 경외감을 갖곤 한다. 백조같은 여성이 되어 편안하게 살길 원하지만, 마음으로 두려움없이 거칠게 성장하는 용기에 박수를 표하기도 한다.

 

플로는 로즈에게 있어서 벗어나고 싶은 존재이면서도, 그녀가 힘들 때 그말 들을 떠오르게 하며, 마지막 장에서 요양원에 있는 그녀를 찾아간다. 통상의 계모에게서 느끼는 반항이나 이질감이 아니라, 보통의 엄마처럼 로즈를 키웠다. 로즈 또한 플로에게서 누구나 갖는 부모에 대한 반감과 속박하려는 그 품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로즈가 사춘기에 동경하던 상급생 소녀 코라’, 우연히 로즈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로즈는 그 사건을 통해 그녀를 동경하게 된다. 동성애에 눈을 뜬다. 코라를 통해 로즈는 애정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사춘기 소녀가 흔히 겪는 동성애로 보인다.

 

로즈는 대학교때 도서실에서 만난 호텔갑부의 아들 패트릭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남편의 집안과 로즈의 집안은 차이가 있어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결혼하면서 중산층의 삶을 누리게 된 로즈는 조산원에서 조슬린을 만나 친분을 나누게 된다. 이 친분은 로즈가 또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 로즈는 딸 애나와 잠시 함께 지내는 시간도 가지지만 결국 애나는 전 남편 패트릭에게 돌아간다. 전 남편 또한 새로운 여인과 결혼하였고, 애나 또한 문제없이 새엄마 밑에서 안주를 한다. 그녀가 겪은 삶고 비슷한 삶속으로 딸이 들어간다.

섭리에서는 그런 것을 표현한 것일까?

 

로즈가 어릴 적 선생님이었던 미스 해티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로즈가 시를 베껴 오라는 숙제를 해오지 않아 그날 남아서 시를 베껴 쓰라고 했다.

그녀는 이야기 한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돼.  넌 도대체 너가 뭐라고 생각하니( who do you think are you?)'

결국 그 말대로 되어 버렸다. 로즈는 똑똑했지만 객관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삶을 살았다고 보기엔 애매하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게 대부분의 삶이다. 살아가다보면 나만 겪는 감정, 나만 겪는 일 같은 건 없다 는 것을 알게 된다. 특별함이라는 건 신기루 같은 것이다.

 

로즈의 삶을 차근차근 따라가면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속에서 반항을 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부자 친구들 속에서 기죽지 않으려는 자존감, 선생님이 아침식사를 어떤 것을 먹는냐는 질문에, 자존감 강한 로즈는 갑자기 자몽반개라고 외친다. 학창시설 선생님이 호구조사를 할 때 느꼈던 감정이 클로즈업된다. 그때 왜 그렇게 물었을까. 어린 나는 선생님이 호구 조사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판단했다. 부자는 대우해주고, 가난한 애는 함부로 대하고 군림하고자 했던 것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인권이란 것은 없었다.

처음 단편 <장엄한 매질>에서

어린 로즈에게 플로는 다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심지어 로즈의 버릇을 고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남편을 거들며 부추긴다. 놀라운 건 로즈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그 결과를 예측한다. 그들은 장엄한 매질이 끝난 후 플로가 가져다 줄 달콤한 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사는게 힘들어서 시골에서 작은 상점을 하며 상점 뒤의 헛간에서 가구를 고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다정함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교양이나 품격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삶이었다.

 

로즈는 고등학교를 다녔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닌다. 당시 사회는 여성의 편견과 무시는 일상이었다. 로즈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애정은 커녕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으며 더 더욱, 로즈는 되바라진 소녀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은 흘러가고 무서운 아버지는 병들고 플로는 늙는다. 로즈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매에 걸려 의식의 흐름이 끊기는 속에서도 이전 추억을 떠올리며 딸에게 의지한다.

기억을 어떻게 꺼냈을 때 추억이 되는 것일까. 로즈에게 닿지 못했을 뿐, 잔소리를 넘어 남자를 조심하라던 플로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아니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달려 가고 싶었던 로즈에게는 불필요한 조언이었다. 세상을 알고 싶었던 로즈, 직접 확인해야만 적성이 풀렸던 로즈였다. 위험을 감수하며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불운이었을지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과감한 여성이었다.

 

이런 행동은 로즈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거지소녀><장난질>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가난한 대학생인 로즈와 부유한 집안의 아들 패트릭의 만남은 강력한 플롯이다. 로즈가 가난해서 좋다는 어이없는 패트릭의 고백, 극명하게 다른 환경은 매력적이었고 로즈도 패트릭을 선택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주변의 부러운 시선을 맘껏 누린다. 어떤 순간에는 충만함을 느끼기도 했다.

 

로즈에게 결혼은 완성이 아니었다. 로즈는 그런 강렬하면서도 뜨거운 것을 찾고자 했다.

친구의 남편과의 연애를 다룬 < 장난질>이 제목이 암시하듯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이 아니라 어떤 탈출구 같은 걸 원했던 것이다. 그 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이혼이라는 결말이 온전히 비극적인 것이 아니므로 패트릭과의 사랑과 결혼은 누구에게는 완벽함이겠지만 로즈에게는 소모품같은 것이다.

로즈에겐 로즈의 공간, 로즈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사이먼의 행운>에서 사이먼이라는 멋진 남자를 만나 비로소 편안을 느꼈지만 몇일 가지 않았다. 이후 사이먼이 암으로 죽은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서 사랑은 현실일 뿐이었다.

 

<스펠링>에서 플로가 늙어 양로원에서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살아간다. 스펠링을 되새기면서 살아간다. 로즈는 누군가가 알아보는 배우로 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면서 사랑을 꿈꾸고 열망을 버리지 않는다.

무엇이 되기를 바랐던 소녀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며 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플로를 돌보면서, 고등학교 시절 교사였던 미스 해터가 했던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질문이 그녀를 붙잡는다.

 

 

나의 느낌 -------------------------------------

이 소설을 읽으면서


로즈는 작가의 앨래스 먼로의 아바타로 거듭 성장을 했다고 느꼈다. 작가의 일대기와 시대적 환경, 장소 등이 일치된다. 작가가 28살 때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을 때 모성의 결핍을 느끼게 하였다. 그런 결핍이 소설속 플로를 만들어 낸 것 같다. 로즈는 새엄마 플로를 거부하면서 독립하여 나가면서 성장을 해간다. 제목, 주인공의 이름으로 보아 패미니즘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전혀 달랐다. 그런 이름을 사용하면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캔디의 왕자님, 백설공주의 변신은 없다. 그 의미를 깨면서 무덤하게 글을 써내려 갔다.

로즈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갔다. 대화도 저돌적이었고, 가장 원초적인 욕설, 성기 등 적나라한 19금의 표현, 동성애, 기차역에서 자칭 목사라는 사람에게 받은 성적추행을 거부없이 받아들이는 모습, 친구, 친구의 남편과 같이 이루어진 쓰리썸의 행위 등 적나라한 표현에 다소 놀랐다. 그런 모든 것이 그녀의 삶에 대한 도전을 표현하는 강인한 소재로 분출되었다. 결핍이 많은 로즈가 사회에 스스로 도전적으로 나갔을 때 부딪히게 되는 잔인한 사랑, 그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눈물로서 후회하는 등 연민을 자아내지 않는다. 일상처럼 무덤하게, 어떤 부끄럼 없이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듯이 무덤하게 그린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아침식사를 무엇으로 먹는냐는 선생님의 질문, 그 답속에 시골과 시내의 차이가 있다. 로즈는 그 때 불현 듯 자몽반개를 외친다.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는 음식이다.

그녀의 대답 속에서 그녀의 꿈틀거리는 자존감을 느꼈다. 가난에 대한 결핍, 어머니의 모성에 대한 결핍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들어진 자존감 속에서 부모로서 결핍이 없는 자녀를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 또한 자존감이 강했다. 부모에 대한 자랑이 주제가 되었다. 한아이가 어머니가 체르니 30번을 쳤다고 자랑하고, 또 다른 친구는 ‘40번을 쳤다고 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당시만 해도 남자선생님이 풍금을 치는 것은 드물었으나 아버지는 풍금을 치셨다. 항상 그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셨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울 아버지는 체르니 100번을 쳤다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가 체르니를 쳤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일순간 말문을 닫았다. 그때 친구들도 나처럼 피아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체르니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따라 거짓말을 하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체르니 30번 치기 전에 100번을 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친구들은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그때는 그랬다.

나 또한 로즈와 같은 결핍으로 궁색한 외침을 한 것이다.

 

로즈와 나는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로즈는 자신의 결핍에 대해 저돌적으로 대처하며 성장했다. 소설 속에서 여성의 아름다움, 연약함을 무기로 신분상승의 계기를 삼은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부유한 남편에 대해서도 스스로 정조를 파괴하면서 까지 굴레를 벗어난다.

 

그녀의 말한디에서 쾌감을 느꼈다. 동질애도 느꼈다. 물론 시대와 장소가 다르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선망이 되는 동성애가 느껴졌다. 어쩜 작가와 같이 로즈는 나의 아바타로 소설속에서 같이했다.

 

내가 대학교다닐 때 사회에 패미니즘이 서서히 불타오를 시기였다. 처음으로 대학에 '여성학'이 등장하였다. 그때 총학생회 여성대표 기호1번 진보 후보가 강인한 진달래꽃으로 비유를 하며 진보 구호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보수 기호2번 후보가 꽃이길 거부한다라는 자극적인 구호를 붙였다.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때 나는 쾌감을 느꼈다.

 

로즈는 이름처럼 여성성을 내세워 삶을 살지 않는다. ‘거지소녀라는 제목처럼 멋진 왕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말하지 않는다. 호텔 갑부의 아들을 만나지만, 그것을 박차고 자신의 인생을 찾는다. 신분의 차이가 삶의 굴레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우로서, 그리고 강의를 하며 살아간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면서 자유를 갈망했고, 혼자 독립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하였다. 부잣집 아들과 결혼을 하였으나 10년정도 살다가 이혼을 한다. 딸 또한 결국 아버지에게로 보낸다.

 

로즈가 사회속에서 형식적으로 성장하는 내용은 다루고 있지 않고, 이혼후 그녀가 배우가 되고, 대학 강의를 하며 사는 모습만 나타낸다. 그녀가 어릴 적 계모 밑에 성장하여 가난으로 얼룩진 상처로 인하여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그녀는 거지소녀였을 뿐이고,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어릴적 친구 랠프를 만나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마지막에 랠프의 장례식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집을 박차고 학교로 가면서 기차 속에서 일어지는 우발적 성적 경험은 그녀가 도발적으로 자초한다. 그때 그녀의 호기심과 성장에 대한 적극성을 엿보았다.

소설 속에서 진솔한 성적비유, 무례한 욕설 등이 나오지만, 그 또한 로즈가 거친 사회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였다.

어떠한 화려함도, 여성성에 대한 표현도 없이 묵묵히 로즈가 성장하며 중년이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잘난 척 한 너도 결국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 품에서 평안을 느낀다는 것, 비록 열정은 없으나 어릴적 남자친구에게서 비로소 안락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누구나 바꾸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그래서 밖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결국 중년이 되어 어릴적 고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갈등하던 부모와의 관계도 추억이 되면 그립고 아름답다.

성장할 때는 서로의 사랑이 서로를 잡아 할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꿈구는 사랑은 잡으려면 마법처럼 사라진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간다.

그런 삶은 그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플로도, 애나도, 그리고 우리들도 겪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캐나다의 여성의 일대기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같은 1978년경 이런 글이 나왔다면 아마 통속적인 글이라면서 가십거리가 되거나, 판매중지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음담패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너무 담담하게 표현을 하여, 오히려 그 글을 읽으면서도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방법으로도 장편소설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 또한 그녀와 비슷한 나이다. 나의 삶 또한 이렇게 단락을 나누면 어떻게 될까, 나 또한 시부모님, 부모님이 언제 요양원에 가실지 모르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곳에서 부모님들과 이야기 할 때, 타협할 수 없었던 충돌도 추억의 뽀빠이과자가 될 것 같다.

인생은 힘들게 단편을 살지만, 결국은 장편이 되는 것이다. 그 나이에 맞는 단편이 설정되기 때문이다. 오십대의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같이 하고, 자녀들이 독립하는 것을 돌보고, 그리고 스스로 노인의 삶을 준비한다. 우리의 세대는 자식에게 돌봄을 받을 수 없고, 나의 마지막은 어쩌면 요양원, 실버타운의 도우미, 그곳에서 같이 하는 노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삶속에서도 나름의 기쁨, 슬픔, 행복, 사랑이 있을 것 같다.

20, 30대에 이성에 눈을 뜨고 이성으로 충족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 인간의 몸처럼 긴장을 풀고, 삶속에서 배척하던 사람들에게도 눈을 뜨게 된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와 어릴 적 바보로 지냈던 망부석과도 같은 사람을 본다. 온 마을의 행사에 그가 있다. 그가 고향처럼 느껴진다.

초등학교 다닐 때 동네 바보가 있었다. 항상 운동장 그네 부근에 앉아 여자아이들을 따라다니고, 섣부른 성행위를 하는 등 문제아로 통했지만, 그애는 늘 웃었고, 늘 거기 있었다. 수십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40대가 되어 나이의 물이 들었으나, 그애는 나이가 들었어도 예전의 그웃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네 옆에 서 있었다.

 

왠지 그 바보애가 고향같았다 그 웃음이.....

 

실존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아무리 바둥쳐도 인생은 굴레를 벗을 수 없고, 또 고향으로 돌아오고, 근원적인 사람들을 찾고 평안을 가진 다는 것이다.

 

'너는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니?'

라고 작가가 소설속에서 수차례 묻듯이 나에게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한다.

나는 내 부모의 딸, 내 아이의 엄마, 성주가 고향인 나이며, 현재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치열하게 오늘도 살아간다. 추억을 씹기 위해 라고 .

사랑, 그리움, 정으로 이루어진 삶, 50이 넘으니 그런 것들이  추억과 같이 소설이 된다. 그 느낌으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