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서구청 노조에서 주관하는 “대구도심 근현대사 답사기행”에 달서구청에 근무하는 친구와 같이 가게 되었다.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뭔지도 모르고 옛 동산호텔에 갔다.
각자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2011. 5. 14 놀토 아침 9시에 모였다.
태양이 높이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민족혼을 불태운 열정처럼 태양은 내얼굴을 비추었다. 준비심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모자가 부러웠다.
○ 3.1운동길 90계단 3.1운동길 계산성당 제일교회 ○ 거리연극으로 되살아난 대구 옛 골목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통감정치의 원흉인 그와 고종황제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1900년 초반 외국인 선교사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면서 , 당시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의료 및 교육사업을 하였다.
동산병원의 유래는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국선교사들이 거주한 곳은 대구성읍 외곽에서 위치하였으며, 그들이 기거한 스위츠 주택등 주변은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당시 건물은 한식과 양식이 어우러져 지었으며, 기초는 조선 영조 때 대구읍성 축성당시 사용하였던 성돌로 하였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고 합니다.
선교박물관에는 각종 성경과 성막에 관한 자료가 있었다. 대구 3.1운동 관련자료 사진, 2002월드컵 사진 등이 담겨 있었다.
그 길이 동산병원과 이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동산병원의 그 좁고, 빈틈이 없는 공간이 이 언덕길과 이어진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동산병원 언덕 솔밭은 대구의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중요한 비밀 통로가 되었다. 시위참가자들은 감시망을 피해 동산병원 솔밭사이로 흩어져 서문시장에 집결하였다.
일부 신명학교 여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는 척 하면서 참여하였다. 동산병원 의료선교박물관 아래쪽에서 시작하여 제일교회 뒤편 골목을 지나 90계단으로 이어지는 좁은 3.1운동길에서 매년 대구 독립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많은 행사들이 치러지고 있다고 한다
3.1운동길 위아래로 제일교회와 계산성당이 마주 하고 있다. 왠지 그것을 보니 독립과 함께 분단된 남북이 생각났다.또한 여당과 야당이 서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처럼 숨가프게 경쟁하는 모습이 생각나다.
한 신을 섬기면서, 나뉘어진 두 개의 첨탑을 보며 새삼 아쉬움이 남는다.
근대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대구의 옛 골목을 거리연극으로 재현한 ‘옛 골목은 살아있다’ 가 5.14일부터 매주 토요일 18회 이상화 고택앞에서 열린다고 한다.
마침 오늘이 첫날이었다. 미리 도착한 우리팀은 공연전 연습장면을 지켜보았다.
고종황제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1841.10-1909.10.26)]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1909년 만주 하얼삔에서 안중근님 에게 저격을 당하여 죽는다.※
곧이어 서상돈 선생님이 일본의 종속을 피하기 위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오페라 남자 가수2명이 아리랑을 부른다.
고종황제의 독살설과 함께 3.1운동이 전개되며, 대구에서 당시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이 재현된다.
그리고 애궂은 학생들이 잡혀가고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죽은 학생들 앞에서 한을 담은 살풀이 춤이 펼쳐진다.
○ 서상돈 고택
2007년 국채보상운동 10주년을 기념해서 서상돈 고택이 새롭게 단장했다.
상주에서 태어난 서상돈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대구로 이사를 했다.
1871년부터 대구에서 소금, 쌀 한지, 포목 등 상업을 통해 대 재력가로 성장하였다.
이것을 보면 미국 및 세계의 나라에서 보듯이, 기독교문화가 뿌리내림과 동시에 독립과 경제성장, 민주주의가 같이 성장하는 이론이 맞는것 같다.
새뮤얼 헌팅턴의 “제3의 물결”이 새삼 되새겨진다.
1907년 대구 광문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다. 당시 일본인에게 진 빚을 우리가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대구 출신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 고택이 있다. 이 골목을 돌아 큰 길로 나오면 바로 1901년 지어진 계산성당이 나온다. 맞은편 제일교회가 서있는 언덕은 제중원(당시 동산의료원)이 있던 곳이다. 이 언덕으로 이어지는 90계단길이 바로 ‘3.1운동길’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 오솔길을 이용했다. 동산병원 소나무숲과 오솔길은 사라졌지만 그 솔밭과 연결된 좁은 길은 여전히 3.1운동길로 불리고 있다. 동산언덕 내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선교사주택 3채가 있다. 현재 의료, 선교, 교육역사박물관으로 각각 쓰이고 있는데 대구 읍성을 허물 때 나온 돌로 주택 기단을 쌓은 점이 특이하다.
역사공부의 중요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부지불식간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독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대마도가 한국땅이라는 역사의 기록을 숨겨온 그들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식민사관의 역사공부를 하여왔다.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우리나라 역사는 친일파 사학자들에게서 만들어졌다.
우리 세대는 배웠다.
통일신라를 배우면서, 발해라는 나라는 거란,여진의 이주민과 고구려의 후손이 새운 나라라고 배웠다. 통일신라의 영토가 우리의 영토라고 배웠다.
다른 땅은 전부 중국 땅이라고 배웠다. 그것이 어떤 함정인지도 모르고, 역사에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을 민족 최대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시험의 비중도 대부분 신라, 통일신라, 조선으로 이어졌다.
김대중대통령 때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남북국시대로 바뀌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껏 일제시대 문화말살의 역사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웅장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보라.
그것을 감추인 채, 신라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승계한 조선을 우리의 역사라고 치부하고, 또한 단군시대를 古조선이라고 부르짖는 역사를 배운 우리,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일제때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 하다.
고조선이라는 명칭도 바꾸고, 조선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감추인 역사 고구려, 발해, 고려를 되찾아야 한다.
이상화님의 시가 저렇게 웅변적이고 저렇게 힘차고 저렇게 아픈 절규인줄 몰랐다.
돌아오는 길 나는 처절한 그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민족의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득담고 돌아왔다.
가수 김장훈이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래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일본이 지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그는 독도를 지키기 위해 계속 노래를 하고 있다.
오늘 왠지 그가 그렇게 크게 느껴졌다.
민족혼은 힘들때 하나되게 만들어준다.
일본이 큰 지진을 겪고 나서 동시에 그들은 독도가 자기땅이라고 부르짖었다.
처음 저들이 왜저럴까 생각을 했다. 민족정신을 모으기 위해 소리내는 것같다.
다시한번 치욕의 역사, 그리고 전쟁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오래동안 점유해온 땅을 왜 저들은 지금에서 그들의 역사교과서를 바꾸어가면서 우리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인가,
다시한번 이를 악물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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