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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엄마

마루치아라치맘 2017. 3. 18. 20:47

훈이 엄마

대구가 직할시가 되면 대구로의 전학이 되지 않아, 경북성주에서 논을 팔아 75년 대구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반양옥집을 샀다. 아버지의 월급으로 대구에서 대가족이 사는게 힘들었다. 당시 세들면 주인집 눈치를 보아야 하고, 우리집같은 대가족은 세집을 구할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셋집에 살면서 아이들 기를 죽이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힘들게 집을 장만했다. 아버지 월급으로는 울 대가족이 대구에서 기본생활 밖에 할수 없었다.

 

명색히 우리가 주인집이다.

당시 방은 4개이다. 2개가 본채에 있고, 2개의 방이 옆채에 있다. 본채는 남향이고 2채는 햇볕이 잘 안드는 방이다.

2개의 방에 할머니, 고모, 4남매,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살았다.

그리고 다락방이있어, 대학생이었던 외삼촌이 생활했다.


집은 있었으나 우리는 세들어 사는 집보다 더 궁핍하게 살았다..

   

세들어 사는 훈이네 집은 그 시절 과외를 하였다. 그 형제는 전교 1.2등을 하였다. 아이들 이름도 김훈, 김홍익이었다. 우리집은 인숙, 영숙 등 너무 흔한 이름이었다. 그 세련된 이름따라 훈이 집은 합리적으로 생활했다.

 

훈이 엄마는 청바지에, 고무장갑, 앞치마,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울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월급이 너무 박해 생활하기에 급급했다. 훈이 아빠도 같이 학교선생님을 하다가  무슨이유인지 사표내고, 개인택시를 장만했다.

우리 엄마는 월남치마에, 슬리퍼, 맨손에 일을 했다. 엄마의 손은 늘 꺼칠했다. 그리고 손빨래를 했다.


훈이 엄마는 늘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청바지를 입고 세련되게 살림을 살았다.

엄마는 동네아줌마 파마고, 훈이 엄마는 커트였다.

나는 늘 훈이엄마를 부러워했다. 세련된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엄마는 돈을 쓰지 않았다. 늘 아끼고 고무장갑도 살 수 없는 그런 살림을 살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집은 우리집이나, 우리는 훈이집보다 초라하게 살았다. 공부방 조차도 없었다.

 

언니는 할머니와 같이 자는 방에서 상을 펴고 열심히 공부했다.

훈이와 나이가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훈이와 홍익은 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고 귀공자처럼 해다녔다.

언니와 오빠는 나름 공부는 잘했으나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 그 당시 과외를 하면 영어같은 경우는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애들을 귀공자처럼 대했고, 우리는 소작농의 자녀같은 존재감을 느꼈다.

울 언니는 선행학습없이 중학교에 올라갔다. 영어발음기호도 제대로 몰라 빨간기본영어보고 수업을 따라갔다.

 과외를 하고, 영어를 어느정도 알고 간 훈이는 학교에서 손꼽히게 공부를 잘했다. 어느날 훈이엄마가 훈이가 책을 잊어버렸다고 숙제때문에 어책을 빌리러 왔다. 언니는 영어책에 영어발음을 우리말로 적어 영어 문장밑에 깨알같이 적어두었다.

언니는 갑자기 지우개를 들어 그 것을 다 지웠다. 그리고 그 책을 빌려주었다.

우리에게 세들어 사는 훈이와 홍익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쩜 그들은 세들어 사는 것이 부끄러워 더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른다. 그네들도 슬픈 사정이 있었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부러워했는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훈이네 집과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한참을 지났다. 언니는 결혼 적령기가 되어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당시 언니와 훈이는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같은 집에 살아, 서로 경쟁을 했다. 그렇지만 두사람은 부끄러워 말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은 그랬었다.

 

훈이는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홍익이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시절 나에게 훈과 홍익이는 근접할 수 없는 오빠들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했다.

 

언니는 결혼을 하였다. 그 이듬해 훈이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보고 “우리 사돈하자”고 했다.

언니가 그렇게 우상으로 여기던 훈이엄마가 사돈을 하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나는 그때 너무 아쉬었다.  소공자처럼 여기던 훈이오빠가 세상에 언니랑, 참 멋졌었는데....


나는 어릴때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엄마는 바보다. 세들어 살아도 학원보내고, 과외시키고 사는데,

주인인 우리는 명색히 집주인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깐...

집주인이지만 돈을 쓰지못하고, 월남치마에 슬리퍼를 신는 엄마

세들어살지만 청바지 커트머리,고무장갑,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훈이엄마

아이들을 위해 어릴때부터 학원이랑 과외를 시키던 그녀

나는 엄마처럼 안살아야지.“고 다짐했다.


세월이 흘렀다.

지금 생각하니, 어쩜 훈이엄마는 더 절실했을 것이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잘살아 볼꺼라고.

아마 그녀는 세상을 보는 지혜가 더 있었던 것 같다.

 

과외받지 못해 공부를 따라갈수 없었던 울 언니

영어읽는 법을 몰라, 영어문장 밑에 우리말로 써내려 갔던 그때 그모습

그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열정이 있었던 울 형제들

지금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요즘 나이가 오십이 되니 갑자기 내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다.

갑자기 내모습이 예전 우리엄마의 전철을 밟으며 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젊음의상징인 어진 청바지를 사서 입었다.

그리고 세련된 단화도 신고, 화장도 화려하게 한다.

돌아가실때까지 먹는 것 입는 것 아끼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젊고, 세련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갑자기 선망의 대상이었던 훈이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청바지, 커트머리, 자전거를 타던 그녀

아들이 없어 나를 딸처럼 이쁘했던 그녀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마 지금도 세련된 할머니가 되어

도시생활을 멋지게 하고 있을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