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인입니다.

응답한다 1994년....

마루치아라치맘 2013. 11. 17. 16:11

응답하라 1994이라고 외칩니다.

그 외침을 따라

10, 20, 30...

나이를 불문하고 따라 외치고, 소리치고, 그리워하고 이야기 합니다.

 

4공화국, 5공화국 시대

그 시대의 배경이 된 모래시계등을

응답하며 살았습니다.

 

1994년 소리를 듣고

모든 세대들이 응답합니다.

그 응답을 나도 합니다.

 

2000년대 아이들은

1994학번 하숙생들의 입은 옷이 촌스러워 웃습니다.

막춤도 우스워 웃습니다.

어제는 어슬프게 체루탄이 터지는 장면이 풍자되고

아이들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

똑같은 삼천포 주민처럼 의아해하더군요

 

시외버스를 타고 하숙생들이 삼천포로 이동하는 모습

그 속에 흘러나오는 추억속의 선율에 잊혀진 그리움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인터넷 겸색하니

1994년 투투의 일과이분의사랑’, 마로니에의 칵테일사랑

레게음악의 대부 김건모의 피계’, 텔레비전 드라마 주제가 김민교의 마지막승부천상의 소리로 유명한 조관우의 ’. 임주리의 립스틱짐게바르고가 나옵니다.

 

당시 김혜자가 엄마의 바다에거 청승맞게 술한잔 마시며 부른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현정의 명성으로 시작하여, 고소용을 알게 한 드라마 였습니다.

 

출연한 배우 정우(1982년생)는 당시 듀스춤을 따라 추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응답하라 1986입니다.

듀스는 낯설지만 그래도 1994년 응답을 할수 있네요

 

나는 그리움에 젖어봅니다.

당시 내가 그리워한 사람

고인이 되어 그리움으로 만나는 엄마, 할머니 모습

 

1994년 나는 무엇으로 존재했는가

이십대 중반으로 치닫으면서

경찰관이 되어 있었네요

 

외할머니가

경찰관이 된 외손녀를 보고 하신 말

할게 그리고 없더나, 순사하게.”

 

일제시대, 6.25를 겪은 할머니는

빨갱이, 반동분자 색출 등,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같은 동네 이웃들이 당한 아픔을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순사의 이미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래방을 많이 다녔고,

해외여행 바람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도 계돈으로 싱가포르를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그때 엄마가 사온 귀걸이는 녹슬은채 내 귀거리 통에 있습니다.

 

삐삐가 있었습니다.

내 좋아하는 말을 녹음하여

컬러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내 좋아하는 곡을

피아노로 쳐서 어슬픈

컬러링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무던히 맞선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최진실 주연의 마누라죽이기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너무재밌어, 부모님이 눈에 밟혔습니다.

 

마침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 영화티켓을 끊어 드렸던 것 같습니다.

 

재밌다고 하실줄 알았는데

의외로 엄마는 저에게

영화보니 니가 결혼안할까 두렵더라.”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결혼시키려고 난리였고, 번번히 고배를 마셨던 그때였습니다. 마누라를 죽이려고 난리를 부린 코미디 풍자극이기 때문이지요

자식밖에 모른 엄마의 마음이 이제야 느껴지네요.

 

그런 시대를 풍미했더 최진실도, 2008.10.2. 생을 마감하고,

이후 안타까운 사연들에 많이 아파했습니다..

 

당시 노래를 하던 가수들은 이제 중연을 지나 멋진 노년을 맞이하면서, 기타에 멋스런 청바지를 입고, 하얀 머리 드러내며 한번씩 텔레비전에 나옵니다.

 

예전이면 환갑을 맞이하는 동시에, 고려장을 생각하고, 소외된 문화층으로 전락하였던 6-70대 분들이 경제적 능력이 있어 당당히 응답하며 살고 있습니다.

 

몇일 전에는

친구들이랑 20대 즐겨찾던

수성호텔에 갔습니다.

낙엽이 호텔 마당 언덕길을

융단처럼 펼치고 있습니다.

 

창넓은 창가에 앉아서 빠알간 나뭇잎을 보았습니다.

머리가 희뿌연 , 나름대로 얼굴주름을 간직한

5-60대 사람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은 그대로 이네요

 

예전에는 호텔레스토랑은 2-30대 전유물이었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대로 지나도 그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2005년 나는 조용필 콘서트를 보러갔습니다.

환갑이 다되어 가는 조용필 오빠

다음에는 그런 공연을 못하리라, 마지막일꺼라

생각하고 당시 큰 금액 10만원 짜리 공연을 보러

5만명 관중이 운집한 대구에 최고 공연장 월드컵경기장을 갔습니다.

 

4-50대 아줌마들이

조용필이

기도하는라고

하자

 

 

오빠라고 화답합니다.

당시 25년전 처럼요

 

손손이 색깔 형광등을 들고

조용필의 노래에 응답합니다.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이쁘게 수놓았습니다.

나는 정말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8년이 지난 지금 조용필은

내가 환갑지났다고 ?’ ‘내가 5만관중이 있는 경기장에서 노래를 못한다고, 나는 살아있어.’

라는 사람처럼 바운스를 히트시키고

또 대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속은 것일까요

 

시대가 변해도

60년대, 70년대 사람들은 응답합니다. 그 문화에...

 

 

다음 회에는 어떤 응답을 기다리른지

그 영상이 기다려집니다

1886년도 응답시켜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