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눈물샘
지금도 엄마가 어디선가 내이름을 부르며 올꺼 같습니다.
한번씩 내가 내 딸 이름을 부르면 엄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엄마는 늘 가슴에 엄마가 없고,
아버지,어머니, 자식, 남편, 친정, 시댁밖에 없었습니다.
가정을 위해 삼통(계)를 하면서 계돈을 수금하러 다니면서
식사 시간을 넘기고 이집, 저집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길거리에 있는 즐비한 음식점 냄새를 자식의 얼굴로 이기고
돌아와 식은 밥에 남은 음식 비벼 드실 때
집이 좋다고 하시면서 배고픔을 손으로 비벼대며 드셨습니다.
저는 딸인지라 그 마음 헤아렸지만
‘엄마는 왜 저래 살까’ 푸념만 했을뿐 마음을 담아 맛있는 음식 사드리지도 못했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자
혼자 침대에 누워 먹을때도
그 한조각 엄마입에 넣어주지 못한 불효 딸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나이들어 편찮으셔서, 아들집에 마음 고생할 때
저의 집에 몇일 쉬러 오시면, 저는 엄마 마음알지만 외할머니에게 따스한 말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님이 계셔서 엄마는 외할머니 목욕한번 못해드리더군요.
할머니가 잠시 나갈 때 외할머니와 앉아서 오손도손 이야기 할 때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얼마나 돌봐드리고 싶었을까. 자식눈치, 할머니 눈치, 아버지 눈치본다고 친정엄마한번 제대로 돌봐두리지 못하고..’ 이제야 그마음 헤아려집니다.
그렇게 저의 4남매를 위해 엄마를 버리고 저희들만 생각하다
그 다함없는 은혜로 저희들 나름대로 사회에 당당히 서게 되었습니다.
새아파트로 분양 받아 입주할 날 점지해 놓고는
엄마는 어느날 암에 걸리셨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픈적도 없는데, 엄마는 아프지 않았는데 왜 그런병에 걸려.”
지금 생각하니 엄마는 약한 몸이셨습니다.
명절이 끝나면 어김없이 누워 계셨는데도
엄마는 곧 아픔을 이기고 또순이가 되어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그때도 청소한번, 빨래한번 도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파도 병원갈줄 모르시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도 자식 때문에 참으셨던 것입니다.
늘 참고 자신은 늘 죽이고 사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그것이 엄마의 생활이었으니깐요.
불효 딸 저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나이였는데도
받는 것에 익숙해버려
엄마에게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마음 다 헤아렸으면서도
엄마를 챙겨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최악의 불효녀였습니다.
병원에 처음 입원하신 것이
암으로 입원하셨고,
그때 처음으로,
엄마는 저에게 칼국수와 회가 먹고 싶다고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칼국수와 회를 사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가 너무 아파서 음식을 드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수술도 안된다고 하여서 민간요법에 의존해야 하는데
밀가루음식과 날음식을 드시게 할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칼국수를 보면 엄마가 생각납니다.
점심시간 그렇게 좋아하는 칼국수 한그릇이지만
자식을 생각해서 배고픔을 참고
집에 돌아와 식은 밥을 먹으며 “집이 좋다”라고 하시던 모습
옆집 아줌마는 그런 엄마를 보고
“너희 엄마는 밥을 너무 많이 드셔서 암걸리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마음으로 울며 말했습니다.
‘아줌마 우리 엄마 배가 큰게 아니라, 칼국수 사드시는 돈이 아까와 배고픔 참다가 집에와서 드셔서 그런거예요. 그런 말 하면 안되요.아줌마는 그렇게 안살아서 우리엄마 깊은 마음 모르니깐요.’
저는 딸이라 엄마의 가슴속 생각을 알았는데도 칼국수 한그릇 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이랑 멋진 레스토랑에서 멋내고 맛난음식 먹으면서도...
그것이 한되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돌아가실 때
엄마는 시집못간 저가 마음이 아파 눈을 못감으셨습니다.
마지막 엄마를 부를 때
혀가 감기며 말을 못하고
눈에 저만 담으며 눈물을 글썽였던 엄마의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서 돌아가시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모가 그말을 듣고 말하더군요
“어린 자식들 힘들까 싶어 병원에서 죽을려고 하는거 너희들은 왜 그것을 모르느냐?”
그때는 집밖에서 죽는 것을 客死라고 하여 병원에 있다가도 운명할 때 집에 모시는 시대였거든요.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랬답니다.
지금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많아 상을 치는 것은 병원에서 하는 것이라고 거의 공식화되었지만요.
저는 청개구리였습니다.
어릴 때 반찬없다고 투정하고,
계란, 햄 등으로 가득찬 친구들 반찬보며
김치로 가득찬 도시락 반찬 보며 부끄러워 도시락 안먹고 오고,
밥먹을 때 반찬없다고 투정하고, 학교다닐 때 거짓말하여 용돈받아내고, 결혼할 때 결혼안한다고 하며 선안보고 하던 모습... 지금도
그 청개구리 모습의 저의 불효모습들
가슴에 부끄러움과 한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맛난 것 사드리고 싶고, 백화점 돌며 같이 쇼핑도 하고 싶은데도 엄마는 뵐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밖에...
엄마는 내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렇지만 저는 엄마처럼 저 자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는 맛난 음식도 사먹고, 이쁜 옷도 사입거든요
아프면 병원도 가고,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저 자신을 가꾸면서 살고 있습니다.
엄마의 한을 알기 때문에
엄마가 마지막 돌아가시면서
혀가 꼬여 말을 못하면서 눈속에 하신 말씀
저에게는 들렸습니다.
“딸아, 나처럼 살지마라. 너가 하고 싶은거 하고 살아라. 내 소중한 딸아”
“엄마는 너무 나 자신을 돌보지 않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딸아 알았지?”
엄마 이제야 대답합니다.
“예 그렇게 살께요. 내딸과 내 아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내건강 챙겨서 엄마인 내가 오래사는 거잖아요. 엄마는 모든 것 다주셨지만, 엄마는 나를 오래 지켜주지 못했잖아요. 엄마! 엄마가 못한 것 나는 할꺼예요. 엄마없는 하늘아래 딸이 혼자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요. 엄마 돌아가시고 친구들이 엄마와 백화점 쇼핑하고, 맛있는 거 사먹으러 가고, 애낳을 때 친정엄마가 옆에서 돌봐줄 때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보고싶어도 볼수 없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수 없고 마음으로 엄마얼굴 찾지만 그래도 엄마와의 시간 내가슴에 가득차 있습니다.
엄마! 짧은 만남이었지만 너무 감사했고, 엄마의 모습은 내가슴에 항상 눈물샘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마음대로 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은 배가 고파 울고, 보고 싶어 울고, 자고 싶어 울고, 삐져서 울지만 나이가 들면 마음대로 울수 없잖아요.
내 자신과 이야기 하고 싶을 때 나는 가슴속 엄마를 품어내면 언제든 울 수 있어요. 엄마는 나에게 눈물샘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샘을 찾으면 항상 어린애가 되거든요. 엄마는 나에게 눈물을 주고, 나는 다시 어린애가 되거든요. 그러면 힘이 납니다.
엄마! 비록 몸은 이별이지만 마음은 엄마와 함께 하고 있답니다.
오늘도 엄마를 부르며 마음속 눈물샘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힘이 납니다. 몇 달은 참을수 있을꺼 같아요. 엄마! 생전에 못한 말 당신께
올립니다. “사랑해요”